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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어느 여름날, 러시아 여행의 추억 - 05.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②여행/2016 러시아 여행 2024. 9. 2. 23:30반응형
러시아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일정이 촉박했기 때문에 나와 K는 빠르게 숙소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날 하루 동안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의 명소들을 돌아보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할 준비를 해야 했다.
우흐 뜨이, 블린! (Ух ты, блин!)
먼저 우리는 숙소 건너편에 위치한 음식점 '우흐 뜨이 블린!' (Ух ты, блин! / 오 그대, 블린이여!)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나와 K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대략적인 동선을 정했다.
이때 러시아의 전통음식 블린(Блин, Блины / 단수형: 블린, 복수형: 블리니)을 처음 먹었는데, 얇고 촉촉한 크레이프(혹은 전병)와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달고 짠 속 재료의 조화가 매우 내 입맛에 맞았다. 블린의 속 재료는 정말로 무궁무진하다. 단순한 잼부터 고급스러운 캐비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속 재료의 사용을 통해서 끝이 없는 맛의 변주가 가능하다. 이런 블린의 매력에 깊이 빠진 나머지, 나는 열차에서의 날들을 제외한 나머지 여행 기간에 매일 한끼 이상 블린을 먹었다. (귀국 후 지금까지도 이 블린이 종종 생각난다. 그럴 때, 나는 서울 동대문 근처의 중앙아시아 거리 음식점들을 찾곤 한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포킨 제독 거리(Улица Адмирала Фокина), 일명 아르바트 거리에서 남쪽 방면으로 우선 발걸음을 옮겼다.
혁명 전사 광장
혁명 전사 광장(Площадь Борцов Революции)은 과연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의 중심이자 시작이라고 할 만했다. 이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기차역, 연해주 청사, 해군기지 등 중요한 사회기반시설과 여러 관광명소가 지근거리에 있었다. (중심지답게 휴일이나 각종 기념일에는 이 광장에서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된다고 한다.)
공산주의 색채가 짙은 광장의 명칭과 각종 기념물은 적백 내전 시기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싸웠던 적군(赤軍)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는 광장 한편에 서서, 이제는 몰락한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의 유산과 그 곁에서 거니는 21세기 러시아인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동상
혁명 전사 광장에서 코라벨나야 제방(Корабельная набережная)을 따라 동쪽으로 걷던 중, 우리는 어딘가 낯익은 사람 동상 하나를 발견했다. 나는 동상 밑 키릴 문자로 쓰인 이름을 떠듬떠듬 읽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197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동상은 비교적 최근인 2015년에 세워진 모양이었다. 바다에서 육지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동상은 20여 년에 걸친 오랜 해외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1994년의 솔제니친을 기념하고 있었다.
С-56(S-56) 잠수함과 영원한 불꽃
솔제니친 동상 바로 건너편으로 커다란 잿빛 잠수함과 함께 타오르는 불꽃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2차 대전 기간에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여러 전과를 올렸던 소련 잠수함 С-56(S-56)이 여러 전쟁 기념물과 함께 야외 기념관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나와 K는 러시아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제2차 세계대전(러시아인들에게는 대조국 전쟁으로 불린다.)을 기억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천연가스를 사용해 끊임없이 타오르는 '영원한 불꽃'(Вечный огонь)과 그 터의 완벽한 상승 구도는 러시아식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 기술의 위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정면에서 볼 때 영원한 불꽃은 바로 뒤편 성당의 배치와 삼각형의 조화를 이루어, 건축에는 문외한인 나조차 숭고, 신성, 승천 등의 이미지를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국가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끌어모으기 위해서, 국난 극복과 승리와 같은 영광의 기억을 선전의 재료로 사용했다. 특히나 러시아(소련)는 과거의 기억을 선전으로 탈바꿈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야외 기념관 한편을 둘러싼 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수많은 소련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나치 독일과의 주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련의 작은 변방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출신의 전사자들 또한 이토록 많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매우 놀랍고도 슬프게 다가왔다. 정든 고향으로부터 지구 반바퀴 이상 떨어진 머나먼 땅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이들의 심정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국가에는 그저 군번 하나로 등록된 일개 소모품이었을지라도, 동시에 그들은 누군가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가족이기도 했다. 전사자 명단 앞에는 한참 동안을 우두커니 서 있던 백발노인이 있었다. 그리고 제각기 놓여있던 수많은 붉은색 헌화와 등불이 있었다. 그렇게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람들은 불귀(不歸)의 객이 된 가족을 70여 년의 세월 동안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는, 이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붉은색 등불들이 바로 옆 위엄스럽게 치장된 '영원한 불꽃'보다 더욱더 영원할 불꽃처럼 보였다.
니콜라이 황태자 개선문
'영원한 불꽃'에 대한 긴 여운을 뒤로 남긴 채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러시아 제국 시절의 문장(紋章)을 꼭대기에 얹은 예쁜 건축물 하나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니콜라이 황태자 개선문'(Николаевские триумфальные ворота)은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니콜라이 2세'가 아직 황태자였던 1891년, 그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다만 나와 K가 본 개선문은 소련 시절에 정치적인 이유로 철거되었다가 2003년에 다시 복원된 문화재였다.
사전 조사를 했던 K의 말에 따르면, 연인이 된 두 사람이 이 개선문 아래를 지나갈 때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지역 전설이 있다고 했다.
독수리 둥지 언덕
개선문을 지나 우리는 독수리 둥지(Орлиное Гнездо)라고 불리는 북쪽 언덕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 올라갔다. 6월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시원하게, 이 항구 도시의 해풍(海風)이 뒤에서 나와 K를 밀어주었다.
마침내 언덕 꼭대기의 전망대에 다다르자,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앞바다 금각만(灣)의 전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언덕과 바다, 커다란 다리와 수많은 선박이 해무(海霧)와 함께 항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평화로운 풍경을 가톨릭 성인(聖人)인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Кирилл и Мефодий) 형제가 거룩하게 수호하고 있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는 고대 슬라브 문화권에 가톨릭과 키릴 문자를 처음으로 전파한 인물들로,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이 보였다.
쇠비린내와 짠내가 뒤섞인 항구 특유의 바람을 맞으며, 두 성인(聖人)과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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